고대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생물학적 방어기전 (면역체계) 을 증가 시킬 수 있는 방법들 가지고 있다. (물론 ancient technology가 더 우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명맥이 이어지지 않으므로, 일단은). 의학, 생물학, 공학 등의 발달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호환, 마마는 과거에 비해 덜 무서워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들의 천칭률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고 싶은가보다. 생물학적인 병증의 극복은 어느정도 진전이 됬을지 모르지만 (근데 근래에 들어보면 그것도 아닌듯하다. AI나 신종플루, 여전히 문제가 되고있는 AIDS등등이 지속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을 보면) 오히려 정신적인 병증이 증가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여러가지 정신적인 병이 있겠지만, 가장 흔하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병이 '우울증' 인듯하다. 우울증의 학문적인 정의를 여기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다수가 알고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근원 역시 다양하겠지만, 정신적인 병증이니 겉으로 들어나 보이는 현상 역시 그 근원만큼, 아니 근원 보다 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무기력, 폭력, 자살 등등. 그러나 우울증의 초기 증상은 대부분 Depression이다. 말 그대로 기분이 다운된다는 것이다.
삶이란 물론 즐거움과 우울함이 공존하고, 또한 그 둘의 상관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즐거움=우울함의 대립에 의한 상쇄효과를 가지며 살아간다. 그러나 상쇄효과란 서로 반대되는 위상의 것들이 충돌 될 때 발생하는 것으로 즐거움+즐거움, 또는 우울함+우울함의 결과는 산술적인 증가가 아니라 지수적 증가를 나타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에 있어서 (나를 포함한) 즐거움+즐거움은 산술적인 증가보다는 로그적인 증가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울함+우울함은 지수적인 증가폭을 넘어가게 되는게 가장 큰 문제다.
나 자신을 예로 들어보자. 근래에 들어 우울함의 근원들이 나에게 달려온다. 학위를 받기위해서 나와야 하는 각종 실험결과들의 참담함.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각종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들. 이것들은 1+1+1=3이 아니라 1+1+1=? 이 되어간다. 물론 이것들을 이겨내거나 긍정적인 요소들로 바꿔주는 convertase가 어딘가는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 자신의 머리속에 있을지, 아니면 주변에 있을지, 아니면 다른 행성에 존재할 지,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사실 역시 공존한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게 삶의 Navigation은 고사하고 이정표도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적인 면만을 비추어보면 우울증 진단을 받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뭘 먹어도 맛을 잘 모르겠다던가 (미각을 잃어버린게 아니라 맛을 종합하는 영역이 기능을 하지 않는것일지도), 뭘 해도 즐겁지 않다던가, 즐겁다는 감정이 지속되는 시간이 너무나 짧다던가, 잠이 오지 않는다던가, 뭘해도 흥이 나지 않는다던가...등등 표면적으로 여러 증상들일 보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아니 생존이 걸린 상황이라면 이러한 고민들과 우울증이라는 병 자체도 사치일지 모르겠다. 아니다. 생존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생각 조차도 들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생존이라는 문제는 그렇게 와닫지가 않는다. 굶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 (단순한 느낌으로만은). 그러나 정말 생명이라는 그 자체의 말살에 가까운 굶주림을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치를 부리는, 흔히들 부자들이 잘 걸리는 병에 다리 찟어진 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뭔가 다른 문제가 있나보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같다. 자신과의 대화보다는 타인과의 대화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대부분 그려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타인과 대화를 많이 하고 있을까?
뭐 일상적인 일들이야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은 언제나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가장 심각한 것은 메인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메인디쉬는 뭘까? 아마도 실험일듯 하다. 그런데 지금 그 메인디쉬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내게 있어 실험과 그 결과물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실험결과가 나와야 논문을 쓰고, 논문을 써야 학위를 받고, 학위를 받아야 졸업을 하고, 졸업을 해야 경제적인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고, 그리고 다시 집중을 해서 인생을 설계해 나갈 수 있는 순환적인 고리가 있다. 그런데 그 고리의 시작점인 실험과 결과물이 나오질 않는다. 이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자 종착이다. 물론 실험이라는 것이 잘 될 때도 있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 현실이면서 Fact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속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바로 그 시간과의 타협점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것이 나를 서서히 미치게 만드는 것이고, 거기에 결정타는 실험의 결과물이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어디서부터 수정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고리를 형성할 수 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비범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결국 현실에 안주하며, 그 속에서 박박 기어다닐 수 밖에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일 뿐.
혹자는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고도 한다. 혹자는 내가 타인과의 접점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근거리에서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그 누구이다. 문제의 시발점이 실험과 그 결과물과 시간과의 타협이라면, 그 시발점에 대해 대화를 할 수 있는 그 누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지금은 없다. 이건 고독이 아니라 소외일지도 모르고, 소외가 아니라 고독일지도 모른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남자는 '자존심'으로 산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난 자존심으로 살아 간다. 아니 자존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락을 잡고 버틴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 그 자존심이라는 별볼일 없는 것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내게 있어서는. 자존심을 버리라거나, 아니면 잠시 내려놓으라고 해도 그건 무리다. 마치 아틀라스처럼, 프로메테우스처럼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젠장. 이것은 방황이 아니다. 병이다. 치료를 요하는. 물론 치료법은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방법을 구할 수 가 없다. 그래서 너무나 우울하고 괴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한탕주의를 버리지 못하나보다. 이 우울함과 괴로움을 한번에 끊어줄 그 무엇을 지금의 나처럼 바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러가지 정신적인 병이 있겠지만, 가장 흔하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병이 '우울증' 인듯하다. 우울증의 학문적인 정의를 여기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다수가 알고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근원 역시 다양하겠지만, 정신적인 병증이니 겉으로 들어나 보이는 현상 역시 그 근원만큼, 아니 근원 보다 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무기력, 폭력, 자살 등등. 그러나 우울증의 초기 증상은 대부분 Depression이다. 말 그대로 기분이 다운된다는 것이다.
삶이란 물론 즐거움과 우울함이 공존하고, 또한 그 둘의 상관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즐거움=우울함의 대립에 의한 상쇄효과를 가지며 살아간다. 그러나 상쇄효과란 서로 반대되는 위상의 것들이 충돌 될 때 발생하는 것으로 즐거움+즐거움, 또는 우울함+우울함의 결과는 산술적인 증가가 아니라 지수적 증가를 나타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에 있어서 (나를 포함한) 즐거움+즐거움은 산술적인 증가보다는 로그적인 증가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울함+우울함은 지수적인 증가폭을 넘어가게 되는게 가장 큰 문제다.
나 자신을 예로 들어보자. 근래에 들어 우울함의 근원들이 나에게 달려온다. 학위를 받기위해서 나와야 하는 각종 실험결과들의 참담함.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각종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들. 이것들은 1+1+1=3이 아니라 1+1+1=? 이 되어간다. 물론 이것들을 이겨내거나 긍정적인 요소들로 바꿔주는 convertase가 어딘가는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 자신의 머리속에 있을지, 아니면 주변에 있을지, 아니면 다른 행성에 존재할 지,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사실 역시 공존한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게 삶의 Navigation은 고사하고 이정표도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적인 면만을 비추어보면 우울증 진단을 받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뭘 먹어도 맛을 잘 모르겠다던가 (미각을 잃어버린게 아니라 맛을 종합하는 영역이 기능을 하지 않는것일지도), 뭘 해도 즐겁지 않다던가, 즐겁다는 감정이 지속되는 시간이 너무나 짧다던가, 잠이 오지 않는다던가, 뭘해도 흥이 나지 않는다던가...등등 표면적으로 여러 증상들일 보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아니 생존이 걸린 상황이라면 이러한 고민들과 우울증이라는 병 자체도 사치일지 모르겠다. 아니다. 생존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생각 조차도 들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생존이라는 문제는 그렇게 와닫지가 않는다. 굶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 (단순한 느낌으로만은). 그러나 정말 생명이라는 그 자체의 말살에 가까운 굶주림을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치를 부리는, 흔히들 부자들이 잘 걸리는 병에 다리 찟어진 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뭔가 다른 문제가 있나보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같다. 자신과의 대화보다는 타인과의 대화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대부분 그려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타인과 대화를 많이 하고 있을까?
뭐 일상적인 일들이야 '그렇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은 언제나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가장 심각한 것은 메인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메인디쉬는 뭘까? 아마도 실험일듯 하다. 그런데 지금 그 메인디쉬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내게 있어 실험과 그 결과물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실험결과가 나와야 논문을 쓰고, 논문을 써야 학위를 받고, 학위를 받아야 졸업을 하고, 졸업을 해야 경제적인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고, 그리고 다시 집중을 해서 인생을 설계해 나갈 수 있는 순환적인 고리가 있다. 그런데 그 고리의 시작점인 실험과 결과물이 나오질 않는다. 이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자 종착이다. 물론 실험이라는 것이 잘 될 때도 있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 현실이면서 Fact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속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바로 그 시간과의 타협점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것이 나를 서서히 미치게 만드는 것이고, 거기에 결정타는 실험의 결과물이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어디서부터 수정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고리를 형성할 수 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비범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결국 현실에 안주하며, 그 속에서 박박 기어다닐 수 밖에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일 뿐.
혹자는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고도 한다. 혹자는 내가 타인과의 접점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근거리에서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그 누구이다. 문제의 시발점이 실험과 그 결과물과 시간과의 타협이라면, 그 시발점에 대해 대화를 할 수 있는 그 누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지금은 없다. 이건 고독이 아니라 소외일지도 모르고, 소외가 아니라 고독일지도 모른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남자는 '자존심'으로 산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난 자존심으로 살아 간다. 아니 자존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락을 잡고 버틴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 그 자존심이라는 별볼일 없는 것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내게 있어서는. 자존심을 버리라거나, 아니면 잠시 내려놓으라고 해도 그건 무리다. 마치 아틀라스처럼, 프로메테우스처럼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젠장. 이것은 방황이 아니다. 병이다. 치료를 요하는. 물론 치료법은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방법을 구할 수 가 없다. 그래서 너무나 우울하고 괴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한탕주의를 버리지 못하나보다. 이 우울함과 괴로움을 한번에 끊어줄 그 무엇을 지금의 나처럼 바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